9.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을 두번째 읽고
- 그때의 나는 모든 집착에 따라붙는 전형적인 착각, 즉 욕망의 대상을 문제가 아닌 해결책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체중과 먹는 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나머지는 따라서 해결될 것이며 평화로운 상태를 찾게 될 것이고 엄밀히 말해 내가 음식을 '먹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먹어도 되는 자유는 느끼게 될 거라는 착각.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게 딱 맞는 남자가 나를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평화를 찾게 될거라는 착각. 내가 세련되고 성숙하고 침착하게 보일 수만 있다면, 그러면 나는 세련되고 성숙하고 침착한 사람이 될 거라는 착각. 내 인생을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형태와 형식에 끼워 맞출 수 있다면, 그러면 나도 정상적으로 느껴질 것이고 문제들은 해결될 거라는 착각. 이런 착각의 잡탕에다 음주까지 더하니 명료한 정신과 변화의 가능성은 모두 최소한도로 줄어들었고, 내가 얻은건 망상의 회전목마, 끝없이 맴도는 서글픈 악순환의 세월이었다.
- 내 생각에 열쇠는 통찰보다는 기꺼이 해보겠다는 마음과 더 깊은 관계가 있고, 통찰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쓸모가 없다. 내 식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나는 아흔 살이 되어서도 상담 치료를 받고 있었을 것이고, 그때까지도 가족과 과거에 관해 한탄조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족시켜야 할 이 필요와 인정받아야할 저 필요, 이 작은 상처와 저 작은 실망, 누구, 무엇, 어디, 언제, 왜, 왜 나야. 기꺼이 할 마음-기꺼이 실험하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끝을 집어 들고 바위와 저항을 쪼아나가는 일에 동참하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는 상당히 공허할 수 있으며, 그런 서사에는 행위가 없고 갈등도 별로 없으며 극도로 희미하게 남은 플롯의 윤곽만 있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통찰의 맷돌이 넣고 돌릴 곡물이다. 이 마음은 당신을 소파에서 일어나게 만들고 당신 잣니의 머릿속에서 빠져나오게 만들고, 집착의 마비에서 벗아나게 한다. 그런 변화가 충분히 길게 이어진다면 당신 자신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고 저 서사의 빈틈을 채우거나 서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된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막막함에 대한 해독제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믿음의 낟알이다. 당신은 아기처럼 작은 한 걸음을 떼고, 또 한 걸음을 옮긴다. 이 작은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저 작은 벼랑에서 뛰어내린다. 그 일을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하면그러는 사이 어디쯤에선가 자신이 공허함과 절망의 순간들을 지나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고통을 기쁨으로 상쇄할 수 있음을. 공포 대신 안전함을 느낄 수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 믿음을 영적인 것으로 정의하든 아니든, 갓 생겨나기 시작한 이 믿음을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든 호의적인 우주나 어떤 더 높은 힘이나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믿음이란 당신이 힘든 밤들을 견디게 도와주고 좋은 밤들을 음미하게 도와주는 신비로운 감정의 저수지를 의미한다. 이것이 있으면 허기가 나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걸, 나에게 필요한 도움과 영양을 실제로 내가 찾을 수 있다는 걸, 내가 괜찮으리라는걸 마음속에서부터 믿을 수 있다.
- 하지만 그런 주기적 절망의 안개 속에서도 나는 시선을 살짝 돌릴 수 있다. 어느 정도의 공허함과 불만족은 삶의 불가피한 부분일 뿐 아니라 유용한 붑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다.
- 허기는 비록 불편하기는 해도, 연료와 비슷하다. 우리가 계속 무언가를 추구하게 만들며, 그 작은 걸음마를 계속하게 힘을 주며,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새로운 영토로 우리를 떠밀어 주는 것이다.
-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 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더 없이 소박하게 포장되어 도착한다. 내 개가 보내는 사랑의 시선으로, 친구와 나누는 농담으로, 여기서느 느끼는 애정의 불씨, 거기서 느끼는 이해로. 그 순간들은 내가 막 노를 젓기 시작할 때 수면을 비추는 아침 햇빛 속에서, 완벽한 한 끼 식사, 완벽한 한문장, 어떤 손길, 어떤 눈빛 속에서 온다. 마침내 이 삶에서 얻는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른 순간들이 있다. 섬광처럼 스치는 만족감, 얼핏얼핏 희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과 맛, 파이처럼 깊이 음미하며 완전히 누려야 할, 금세 지나가는 순간들이.
이 책을 처음 읽은건 2021년 겨울이었다. 그 때는 앞의 챕터들에서 분석해준 욕망, 허기의 매커니즘에 공감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나도 굶기+과한 운동을 하며 체중감량에 많이 집착하던 때여서, '오 나도 이런 경험이 있는데'하면서 읽었었다. 내가 이상한게 아니다라는 위로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었을 때는 앞의 챕터들은 그냥 휙휙 넘겼다. 책에서 서술하는 것들이 이제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기도 했고, 이 삐걱대는 공식을 설명만 하고 해소할 수는 없다는 절망감이 들어서그랬다.. 그리고 맨 마지막 챕터에서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챕터를 읽었을 때 앞장에서 느꼈던 절망감들은 사라졌고, 비로소 저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세지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결국에는, 삶에 존재하는 허기/욕망/문제들을 풀 수는 없다. 그런 것들은 영원히 나와 함께 갈것이고, 내가 무언갈 이루더라도 필연적으로 또 다시 다른 종류의 허기를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절망적인건 아니다,,오히려 긍정적이다. 허기를 허기로 부를 수 있게 되고, 부족한 나를 인정하게 될때 비로소 내 곁에 있는 충만한 것들이 보일 테니까,,,
책이 여성의 욕망 (주로 거식증, 쇼핑중독, 관계중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생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말고, 부족한 것들 앞에서 빙빙 맴돌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내 영혼에 난 구멍을 이해하고, 구멍난 채로 그냥 살아라~! 그거 말고도 인생에는 행복한거 많다!!
무한 긍정, 터무니 없는 자기 암시를 늘어놓는 책보다는 아주 솔직하고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